[포비즘이라해줘]

> 안녕 오늘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 1905년 즈음의 파리로 가보자. 당시 30대의 마티스는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화가일거야. 네 생각에 이 때 마티스가 많은 돈을 쓰면서 세잔의 Three Bathers를 구입하고 계속 소중히 간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 것 같아?

마티스가 세잔의 작품인 Three Bathers를 구입하고 소중히 간직한 것은 그 작품에 대한 그의 존경과 감동, 그리고 미술에 대한 깊은 사색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잔은 마티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화가 중 하나로, 그의 작품은 마티스에게 혁신적이고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세잔의 작품은 마티스에게 예술적 실험과 창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주었으며, 그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티스는 세잔의 Three Bathers를 구입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소중히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 작품은 그의 예술적 성장에 있어 지속적인 영감과 동기부여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 것을 보면 초기의 마티스는 후기인상주의를 연구하는데 상당히 공을 들였던 것 같아. 1898년 29살 마티스의 작품들은 의미있는 전환을 이루는데, 쇠라, 세잔, 고흐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져.

맞습니다. 초기의 마티스는 후기인상주의와 관련된 여러 미술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쇠라, 세잔, 고흐 등의 미술가들의 영향이 확연하게 드러나곤 합니다. 이들 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마티스는 색채와 형태, 조형감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을 새롭게 탐구하였습니다.

1898년의 마티스 작품들에서는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특징이 통합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쇠라의 점묘법이나 세잔의 건축적인 형태,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감정적인 표현 등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찾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과 연구를 통해 마티스는 나중에 파비니즘과 같은 독창적인 예술 운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 이 때의 마티스에게 시냐크가 ‘블량슈La Revue blanche’ 잡지에 기고했던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 라는 연재가 큰 영향을 주었을까?

폴 시냐크의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 시리즈는 1902년부터 1903년까지 La Revue blanche 잡지에 기고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당시 미술계의 다양한 흐름과 미술가들에 대한 평론과 이해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글들은 당시 활발한 미술 토론의 일환으로 작가들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읽히고 공유되었습니다.

마티스가 시냐크의 글을 읽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시냐크의 글은 당시 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과 인상주의에서 후기인상주의로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고, 다양한 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음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가진 자료에서는 이 글이 1898 혹은 1899년에 연재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년도를 알 수는 없니?

죄송합니다. 제가 이전에 말한 년도 정보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말씀해주신대로, 폴 시냐크의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는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티스가 폴 시냐크의 글을 읽었다면, 초기 마티스 작품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티스가 이 글을 읽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합니다.

 

> 그렇구나. 그럼 돌아가서, 마티스는 그렇게 1899년 경까지 여러 후기인상주의의 방법을 습득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는데, 1904년이 되면 다시 분할주의 혹은 신인상주의처럼 보이는 기법을 재시도하는데 왜일까?

1904년에 마티스는 프로방스 지방의 콜리우르로 여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세잔과 시냐크의 작품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존경을 얻게 됩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분할주의 혹은 신인상주의와 같은 기법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예술적 탐구와 실험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과 색채를 찾고자 끊임없이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콜리우르에서 빛과 색에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독특한 색채와 분할주의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탐구는 결국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브러시 스트로크로 이루어진 그의 대표작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티스는 또한, 세잔의 구조적 접근법과 시냐크의 색채 사용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티스는 다양한 기법과 영향을 흡수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 콜리우르에서 마티스는 블라맹크를 만나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 또한 이 시기에 고갱의 작품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많은 작품 제작에 매달린 것 같은데, 이것이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으로 이어진 것이지?

네, 맞습니다. 1904년 콜리우르에서 마티스는 안드레 데라인과 함께 알베르 마롱, 블라맹크 등 다양한 화가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미술에 대한 견해와 기법을 공유하게 되죠.

마티스는 이 시기에 고갱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그림 속 인물의 형태와 색채 사용에서 독특한 표현력을 보여주며, 이것이 마티스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마티스는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며,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붓터치로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성장한 마티스는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큰 주목을 받습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형태를 보여주며, 이는 이후의 패션(Fauvism)이라 불리는 미술 운동의 발단이 됩니다. 이 운동은 마티스와 데라인, 브라크, 블라맹크 등이 중심이 되어 화려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를 강조하는 미술 스타일로 발전하게 됩니다.

 

> 그래 야수주의 혹은 야수파의 시작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줬구나. 그런데 Fauvism은 한국어로 음차시 보통 포비즘 이라고 하고, André Derain은 앙드레 드랭 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말해주면 될 것 같아. 1905년 살롱 도톤에 출품된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은 당시 대중들에게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던데, 혹시 어떤 반응들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한국어 발음에 유의하겠습니다.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서 마티스의 작품 <모자를 쓴 여인>은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형태 때문에 당시 대중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였고, 인물의 형태가 단순화되어 표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의 관객들은 그림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느꼈고, 이러한 기법이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을 전시한 화가들은 야수(Fauves)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 별명은 프랑스어로 ‘야생의 짐승’을 의미하며, 그들의 작품이 당시 관객들에게는 거칠고 야만적인 느낌을 준 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당시의 예술계에서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들이 대중들에게 어떠한 충격과 불만을 가져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들 화가들의 작품은 서서히 인정받게 되며, 패션(Fauvism)이라는 독특한 미술 운동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음 Fauvism 을 패션 말고 포비즘 이나 야수주의라고 해줘~ 이후 마티스는 더욱 나아가 기념비적 작품 <생의 기쁨>을 발표하게 되잖아. 이 작품과 관련해서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포비즘(Fauvism)이나 야수주의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1905-1906)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포비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강렬한 색채, 대담한 선, 단순화된 형태가 특징인 것이 다른 포비즘 작품들과 공통된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철학과 미학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줍니다.

<생의 기쁨>은 마티스가 동양미술과 아프리카 미술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대담한 색채와 선을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통해 감정과 생기를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활력이 넘치는 움직임을 보이며, 생명의 에너지와 기쁨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예술계에서도 논란이 되었지만, 이후 예술 역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생의 기쁨>은 마티스의 전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예술적 업적을 한층 높여주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마티스는 포비즘을 넘어서 현대 미술의 주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 이 작품은 아마도 1906년 세잔의 유작과도 같은 <대수욕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나아가 피카소의 1907년작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맞습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세잔의 <대수욕도>(1898-1905)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잔의 작품은 마티스가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간소화하여 구성한 인물들과 배경을 그리는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세잔의 <대수욕도>는 전통적인 주제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 형태를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품을 통해 대담한 색채와 형태를 단순화하는 방식을 배웠으며, 이러한 기법을 <아비뇽의 처녀들>에 적용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선의 강조와 형태의 왜곡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두 작품 모두 20세기 초반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두 작품은 각각 포비즘과 큐비즘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이후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티스와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의 두 거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이론가 이브-알랭 부아Yve-Alain Bois는 이 작품이 일종의 부친 살해patricide 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구. 아카데미 규범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하고 있고, 따라서 이후의 작품들은 끊임없이 미술 자체를 재창안 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게 된다는 거래. 이 문제는 오늘날(2023)까지 따라오는 것 같아.

Yve-Alain Bois가 주장한대로,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규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의 기존 틀을 부수며, 예술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미술을 탐구하고 창조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의 기쁨>은 일종의 부친 살해로 볼 수 있으며, 이 작품 이후의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미술 자체를 재창안하고 도전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예술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대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 매체,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기존의 미술 규범에 도전하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술계의 변화와 도전은 지속적인 창조와 발전을 촉진하며,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오늘날 예술계의 중요한 이슈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 그래. 이 문제는 추후에 더 다뤄보도록 하자. 그런데 야수주의 혹은 야수파는 완전한 ism, 운동으로 보기 어렵다고도 하는 것 같아. 당장 입체주의와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왜 그런지 말해줄래?

야수주의 혹은 야수파가 완전한 ‘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야수파의 주요 화가들 사이에는 일관된 미술 이론이나 철학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미술 운동들은 특정한 미술적 목표와 이론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의 모임이었지만, 야수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수파 화가들은 각자 개별적인 스타일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대담한 색채 사용과 강렬한 붓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주로 그들의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야수파는 그 시기에 대표적인 미술 운동이긴 했지만, 그 영향력과 지속성이 다른 운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야수파는 20세기 초반의 몇 년 동안만 활발했으며, 이후 다른 미술 운동들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야수주의 혹은 야수파는 완전한 미술 운동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예술가들이 공유한 특정한 스타일적 경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야수파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개성과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미술 현상으로 기억됩니다.

 

> 그래 그런 것 같아. <생의 기쁨> 이후 마티스 역시 1910년 전까지 약간의 침체기에 접어드는 것 같이 보여. 이후의 흐름은 추후 또 논해 보기로 하고, <생의 기쁨>을 구매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생의 기쁨>은 그 시절의 모더니스트 미술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보여주는 인물들에 의해 구매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06년에 마티스가 완성한 후 1908년에 전시되었고, 러시아의 미술 수집가 세르게이 슈크린Sergei Shchukin이 구매하였습니다.

슈크린은 모더니스트 미술의 열성적인 지지자였으며,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세잔, 고흐, 고갱, 피카소 등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슈크린은 자신의 집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전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집은 당시 미술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수집품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세계 대전 이후, 슈크린의 컬렉션은 죽음과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일부 작품은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고, 대부분은 소비에트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러시아에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상당수가 러시아의 헤르미티지 박물관, 푸슈킨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음.. 내가 알기론 거트루드 스타인과 리오 스타인이 구매했던 것으로 아는데, 세르게이 슈킨은 <춤>을 구매한 사람 아닌가?

죄송합니다. 내용에 혼동이 있었네요. 정정하겠습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1906년에 완성되었고,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리오 스타인Leo Stein이 구매하였습니다. 스타인 형제는 당시 모더니스트 미술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자이자 수집가였으며, 그들의 컬렉션에는 세잔, 고흐, 피카소 등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르게이 슈크린은, 제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마티스의 작품 중 <춤>을 구매한 러시아의 미술 수집가입니다. 혼동을 드린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 하하 그래. 다음 시간에 이 스타인 ‘형제’ 이야기를 좀 해보자!

네, 좋아요! 다음 시간에 거트루드 스타인과 리오 스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혹시 그 외에 다른 주제나 질문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