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짱]

> 안녕 오늘도 반가워. 1911년으로 가볼텐데, 당시 루브르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대해 좀 말해줘.

안녕하세요! 1911년 8월 21일에 일어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그 시대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 직원인 비냐지오 페루지아가 루브르 박물관에 침입하여 “모나리자”를 훔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페루지아는 루브르 박물관의 직원으로, 그는 박물관이 주말 동안 문을 닫은 사이에 숨어 있었고, 월요일 아침에 화가 누가 가려져 있는 모나리자를 그냥 집어가버렸습니다. 그는 그림을 박물관에서 나가면서 언더웨어 상자에 숨겼습니다. 이 작품을 훔치는 데에는 단지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그림을 이탈리아로 가져가서 팔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도난당해 프랑스로 가져온 것이라며 그림을 ‘반환’하려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1913년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의 명성을 더욱 높였고, 이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욱 촉발시켰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박물관의 보안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어, 전 세계의 박물관에서 보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반환’이라고 주장한게 재미있네. 그렇다면 그러한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Journal de Paris 신문사가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를 고발했던 일도 알고 있니?

네, 그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Journal de Paris는 1911년에 Pablo Picasso와 그의 친구인 시인 Guillaume Apollinaire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사실 그들 둘은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이러한 혐의가 제기된 배경에는 복잡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아폴리네르의 집에서 발견된 Iberian 조각들과 관련된 법적 문제로 이미 수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조각들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쳐진 것이었지만,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 조각들을 예술 거래상에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겹치자, 언론은 두 사람을 더욱 확대 해석하여 도난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이후에 그들에 대한 혐의는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미술계와 언론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로 여겨집니다.

 

> 앗 그래? 내가 알기론 1907년경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비서였던 게리 피에레Gery Pieret라는 사람이 이베리아 조각품들을 ‘좀도둑질’ 해서 피카소에게 주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물론 피카소는 이것이 장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게리 피에레로부터 받았을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알고 받았겠거니 했어. 피카소의 인품을 생각해보면.. 하지만 법적으로 혐의가 기각되었으니, 모르고 받은게 맞겠지 뭐.

그렇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발생한 일입니다. 게리 피에레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베리아 조각품들을 훔쳐 피카소에게 팔았고, 피카소는 그 조각품들이 훔쳐진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겹치면서 피카소와 아폴리네르가 혐의를 받게 된 배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피카소의 인품에 대해 반드시 부정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당시의 예술계에서는 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비일비재했고, 특히 피카소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실천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얻거나, 기존의 예술적 규범을 도전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대한 혐의는 물론, 이베리아 조각품 도난 사건에 대한 혐의도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혐의는 주로 미술계와 언론의 복잡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예술적 업적을 어둡게 덮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 하하 맞아. 내가 피카소의 인품을 생각해보면 이라고 말한 것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어. 아무튼 1911년으로 오면 그 이베리아 조각은 이미 피카소의 관심 밖에 있었대. 4년 사이에 여러 도전을 하고 있었나봐.

그렇습니다. 피카소는 그 시기에 여러가지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에 도전하며 그의 예술적 관점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큐비즘의 초기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개발한 새로운 예술 형식입니다.

그들은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전통적인 투시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신에 동시에 여러 관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실험과 도전은 그들이 이베리아 조각품에서 얻은 영감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이 같은 공동 작업은 1912년까지 이어졌고, 그들이 개발한 큐비즘은 20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그러게. 브라크와 피카소는 이 시기 작품에 서명을 안하는 적도 있을 정도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대. 더불어 아폴리네르를 비롯한 여러 예술인들은 다양한 저술을 통해 입체주의를 변호해주는 양상이었나봐.

그렇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협업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파트너십 중 하나로, 그들은 서로에게 큰 영감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의 예술적 접근 방식과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반영하였습니다.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와 에세이를 통해 그들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선언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존재감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저서 “The Cubist Painters, Aesthetic Meditations”에서 입체주의를 변호하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책은 입체주의를 철학적, 미학적 측면에서 분석하였고, 이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폴리네르는 그의 시대의 혁신적인 예술 움직임에 대한 중요한 해

 

> 이어서 말해줄래?

그럼요.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입체주의가 단순히 형태와 구조를 쪼개고 재구성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운동이 예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현실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이 단순히 관찰된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과 감정, 생각을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가 단순한 미학적인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는 철학적인 운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가 20세기 초의 예술, 문화,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 운동이 단순히 예술의 형태와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와 시는 입체주의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 언급한 아폴리네르의 “The Cubist Painters, Aesthetic Meditations” 외에 다른 저술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장은 ‘입체주의의 방식이 재현적인 방식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여준다’ 라는 점이래. 인간의 시각은 어떤 위치에서도 대상의 전체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대상의 뒷면 등을 보여주는 입체주의가 더 많이 보여준다는 뜻이라나.

그렇습니다.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가 단일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전통적인 재현적 방식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입체주의는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이를 한 화면에 통합함으로써, 대상의 ‘전체’를 표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점에서 아폴리네르는 입체주의가 더욱 ‘진실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물체를 보면, 우리의 눈은 한 번에 한 방향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는 그 물체를 주위에서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입체주의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모두 화면에 담아내려 한 것이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이런 접근 방식이 대상의 다양한 면을 동시에 표현하므로, 그것이 전통적인 재현적 방식보다 더 ‘진실한’ 표현을 제공한다고 주장

 

> 이어서 말해줄래?

입체주의는 그저 물체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물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재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물체를 보는 시각적 경험뿐만 아니라, 물체를 이해하는 개념적 경험까지도 포함하려 했던 것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이런 주장을 통해 강조하려던 것은, 입체주의가 단순히 형태를 변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입체주의는 그림의 형태를 변경함으로써,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려 했습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당시의 많은 이론가들에게 충격적이었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후대의 미술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입체주의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 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했으며, 이것은 결국 현대 미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 당시 저술들에서 드러나는 또다른 황당한 점은, 입체주의를 변호하기 위해 과학적 용어를 빌어서 사용했다는 점 아닐까? 원근법의 파괴를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을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던가, 차원의 비유를 사용한던가.

네, 그렇습니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그 당시 새로운 과학적 이론들, 특히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대중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와 겹치는데, 이는 우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입체주의는 형태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고, 이러한 생각은 과학에서의 새로운 이론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체적인 존재로서 물체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입체주의가 물체와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과학적 언어의 사용은 입체주의가 단순히 예술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학적 용어의 사용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입체주의의 초기 이론가들은 종종 과학적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했지만, 이런 비유가 항상 정확하거나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입체주의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 그런 것 같아. 반면, 피카소의 화상이었던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는 1920년 “입체주의의 발원The RIse of Cubism”에서 마치 40년뒤의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입장을 예견이라도 하듯, 회화의 내적 논리를 강조해내고 있대.

맞습니다. 다니엘-헨리 칸바일러의 “입체주의의 발원”에서 그는 입체주의를 회화의 내적 논리를 따르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후에 추구하게 될 ‘순수미술’에 대한 생각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린버그는 회화가 그 자체로서의 회화적 특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회화가 그 외 다른 예술 형태나 다른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의 언어를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칸바일러의 경우에도 비슷한 맥락에서 입체주의를 이해했습니다. 그는 입체주의가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 즉 공간, 형태, 색채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봤습니다.

이런 해석은 그림이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을 강조합니다. 이는 모더니즘 미술의 핵심적인 원칙 중 하나이며, 입체주의가 이런 원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잠시 칸바일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칸바일러는 자신의 소장선을 프랑스 정부에게 압수당하는 사건을 겪게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는 실질적으로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의 전체 미술 컬렉션을 압수당했습니다. 칸바일러는 독일 태생이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성인 시기를 보냈고, 프랑스인으로 자신을 간주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새로운 미술 운동, 특히 입체주의에 열광했으며, 그의 컬렉션은 이 시기의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자, 칸바일러는 독일 국적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컬렉션을 ‘적의 재산’으로 간주하고 압수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칸바일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이후 수년간 법적인 싸움을 벌여 그의 컬렉션을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되었고, 그의 컬렉션은 결국 프랑스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입체주의에 대한 헌신을 포기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 이후 칸바일러는 1915년 부터 스위스에서 입체주의에 대한 저술을 이어가다가, 위에 이야기한 “입체주의의 발원”도 작성하게 된 것 같아. 그의 1차대전 뒤 여생에 대해 이야기 해줄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니엘-헨리 칸바일러는 스위스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나머지 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며, 그의 쓰기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는 특히 입체주의에 대해 계속해서 쓰고, 이 운동과 그것의 주요 예술가들에 대한 중요한 원고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 생활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의 예술 컬렉션을 잃은 후, 그는 결코 그의 예전 삶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건강도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 후반에 건강 문제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생애 마지막 수년을 투병하며 보냈다는 점에서 예상 가능했지만, 그의 죽음은 그가 미술 역사에 남긴 뚜렷한 흔적과 대조적으로 상대적으로 조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입체주의와 초기 20세기의 다른 예술 운동에 대한 중요한 참조 자료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입체주의의 발원”은 특히 입체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그의 컬렉션들은 프랑스 정부가 소유한 뒤, 1921년과 1923년의 경매를 통해 매각된 것으로 알고 있어. 칸바일러 본인도 응찰에 나섰지만 실패한 것 같아. 이 경매에서 많은 작품이 미국인들에게 팔렸다고 해.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미국미술의 성공에는 이렇듯 많은 모더니즘 미술품들이 미국인에 손에 있었던 것이 주요했다는 의견도 있어.

네, 그렇습니다. 칸바일러의 컬렉션에서 매각된 작품들 중 많은 수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고, 이는 미국에서 모더니스트 미술의 인기를 끌게 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칸바일러의 컬렉션에는 피카소, 브라크, 그리고 다른 주요 입체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이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미국의 예술 시장에 모더니즘에 대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미국에서의 모더니스트 미술 움직임의 성장과 그 이후의 추상 표현주의 등의 미술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미술 기관과 갤러리들이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의 모더니즘 미술 시장은 확장되었고, 이는 미국의 미술계에서 유럽 미술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독특한 미국의 미술 양식과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는 20세기 후반에 미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번외편이지만 내 연표DB의 컬럼 구분 중 하나는 ‘미국짱서양최고’ 로 되어있네. 아무튼 나는 양차대전기부터 미국에서 전개된 흐름을 매우 좋아한다는 그런 이야기야. 제국이 어떻네 서발턴subaltern 이 어떻네 하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고찰해도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군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미술의 발전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겠네요. 20세기에 미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과정은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 미국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미술 시장이 확장된 것, 그리고 미국의 학계와 미술 기관들이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미국 미술계가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운동과 양식을 창출하고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미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등장한 추상 표현주의, 팝 아트, 미니멀리즘 등의 운동은 미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미국 미술계의 독립성과 창조성을 보여주는 한편, 국제적인 교류와 영향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국 미술계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고, 서발턴에서 제국으로의 변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 하하하 ‘서발턴에서 제국으로의 변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은 너무 재미있는 말이다. 최고다 너.. 아무튼간에 칸바일러로 돌아가면, 회화 ‘외’ 적인 요소, 그러니까 고적적인 원근법에서부터 새로운 과학적 발전에 따른 용어같은 것을 빌어오지 않고도 회화가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다는 접근은 참 매력적인 이야기였던 것 같아.

그렇습니다. 칸바일러의 접근 방식은 그 자체로 회화의 개념을 확장하고, 미술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그의 이론은 회화가 자체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그 과정에서 독특한 미학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회화가 본질적으로 비술적인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의 표현 방식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단지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의 본질적인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칸바일러의 이론은 미술이 자체의 독특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언어를 통해 다양한 표현과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미술이 다른 학문 분야나 문화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미술가들이 자신의 창작 활동을 통해 미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확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칸바일러의 이론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방향성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미술가들은 더욱 깊이 있는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