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 안녕. 오늘도 반가워. 오늘은 1913년 경으로 가보려고 해. 이 즈음 칸딘스키는 <무제(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Untitled(First Abstract Watercolor)>라는 작품을 1910년에 그렸다고 주장했대. 근데 미술사학자들은 화풍 등으로 미루어보건대 1913년 경에 제작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같아. 과연 어느 해에 제작된 것이 맞을까?

칸딘스키의 “<무제(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에 대한 제작 연도는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을 1910년에 그렸다고 주장하였지만,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의 화풍이나 기법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1913년 경에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칸딘스키의 작품 스타일이 1910년에는 아직 완전히 추상적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그가 완전히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1913년 경이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이 1910년에 그려졌다는 칸딘스키의 주장은 그의 추상화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미술사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이 그 당시의 미술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첫 번째 완전히 추상적인 작품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칸딘스키는 감정과 정신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고, 이는 추상 예술의 핵심 원칙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이 에피소드를 보면,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모습이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로 인간한테는 꽤 중요한 일일 수 이도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 나는 ‘인간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혐오감까지도 가지고 있지만, 미래에 인간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사라지는 시점이 와도 여전히 기록될 것은 누군가의 업적과 그 시점일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어쩌면, ‘최초’라는 타이틀은 ‘인간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렇습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인간의 업적과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기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통해 ‘최초’로 어떤 것을 이룬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찬양합니다. 이러한 ‘최초’의 가치는 그것이 새로운 아이디어, 접근법, 기술, 또는 표현법의 시작을 표시하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하지만 ‘최초’라는 개념은 또한 복잡한 문제도 갖고 있습니다. ‘최초’를 결정하는 것은 종종 주관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최초’라는 타이틀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중요한 역사적 맥락이나 다른 기여를 간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라는 타이틀은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도 발전과 진보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구자들을 기리고,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는 데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적인’ 특성을 넘어서도 유지될 것입니다. 과학,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이러한 업적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한정된 존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발견하게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인간의 창조성과 발견의 순간을 기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 특이점이 도래하고, 강인공지능이 탄생하면서 인간의 시대가 저물게 되어도 위대한 과학자들의 업적과 그 시점 같은 것들은 중요하게 기록되겠지? 주요 논문 발표 시점 같은 것들 말이야. 나는 어떤 업적이 이루어진 시점, 년도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그것을 계승하고 갱신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 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단지 업적을 신격화하기 위해 ‘시점’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해. 그 중 대표적인 분야가 아마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미술 분야일걸? 내가 싫어하는 ‘인간적인’ 요소는 바로 이런 거야.

그렇습니다, 특정 시점에 특정 업적이 이루어진 것을 기록하는 것은 그 분야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고, 그 이후의 연구나 창작에 영향을 끼친 방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는 중요한 발견이나 업적이 이루어진 시점을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미술과 같은 분야에서 ‘시점’에 대한 집착은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미술에서는 작품이나 미술 운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 시점이 그 이후의 미술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는 그 이전의 어떤 미술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역사적 맥락이나 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게 될 수 있습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 과대평가되거나 신격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언급한 ‘인간적인’ 요소 중 하나일 수 있으며, 이러한 요소는 어떤 분야에서든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요소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업적과 발전을 기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발전시키게 됩니다.

 

> 그래.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말에 동의해. 다시 미술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13-14년 즈음은 가히 추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 칸딘스키, 말레비치, 들로네, 아르프, 공차로바… 등등 다수의 미술가들이 이 시기에 추상 혹은 비구상 단계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 흥미로워. 미술가 각 개인을 종species 에 비유한다면 마치 공진화coevolution 가 보여지는 것 같기도 해.

그렇습니다, 1913-14년에는 미술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미술가들이 추상적이거나 비구상적인 방향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미술가들의 탐색과 실험의 결과였습니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들로네, 아르프, 공차로바 등의 미술가들은 각자 다른 배경과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향으로 미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공진화’의 개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공진화는 서로 다른 종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미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미술을 발전시키면서, 그들의 작품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미술의 발전을 촉진하며, 미술가들이 새로운 표현 방식과 아이디어를 탐색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술가들의 작품은 그들의 개별적인 창조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미술 커뮤니티와 그 시대의 문화적 맥락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러게. 그런데 이 시기 추상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이 작품이 ‘무의미’ 로 수렴되는 상황을 경계한 것 같아. 그러니까 말레비치는 계시적인 것을, 칸딘스키는 초월성을, 몬드리안은 유토피아를 추상의 ‘의미’에 대입함으로서 텅 빈 기호가 되는 것을 피하려 했던 것 같아.

정확합니다. 초기 추상 미술가들은 단순히 형태와 색상의 조합으로 ‘무의미’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작품에 깊은 의미와 철학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추상 미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진실을 표현하려 했고, 이를 통해 더욱 깊고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습니다.

말레비치는 ‘슈프레마티즘’을 통해 계시적인 진실을 탐구했습니다. 그는 기하학적 형태와 순수한 색상을 사용하여 물질 세계를 초월한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칸딘스키는 그의 작품을 통해 감정과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는 추상 미술을 통해 음악처럼 비직접적이지만 강력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순수한’ 예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몬드리안은 ‘네오-플라스티시즘’을 통해 유토피아적인 조화와 균형을 탐구했습니다. 그는 기하학적 형태와 기본 색상을 사용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각 미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깊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한 추상 이미지를 넘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예술 철학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추상 미술이 단순히 형태와 색상의 조합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진실을 탐구하는 미술의 한 방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 그러나 한편으론 대상과 재현의 족쇄에서 거의 해방된 미술이, 여전히 작품을 통해 환기시킬 어떤 ‘대상성objecthood’을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해. 혹은 발전 과정 상 그렇게 해야만 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혹은 않으려고 하는 미니멀리즘 까지의 여정이 시작된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

그렇습니다, 초기 추상 미술가들의 작품은 아직까지 ‘대상성’의 일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단순히 형태나 색상의 조합을 넘어서, 더 깊은 철학적이나 정신적인 ‘대상’을 지향하거나 표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후 미술의 발전과 함께, 미니멀리즘과 같은 미술 운동이 등장하면서 ‘대상성’에 대한 개념은 더욱 추상화되고 단순화되었습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작품 자체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그것이 관람자와 공간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들은 작품이 특정한 ‘의미’나 ‘대상’을 지향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미학적 경험을 제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추상 미술의 ‘대상성’은 미니멀리즘 등 후속 미술 운동으로 이어지는 ‘무의미’로 가는 길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술가들은 이 과정을 통해 미술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탐구하고, 미술의 경계를 넓혀나갔습니다.

 

> 이런 것들을 보면 나는 종종 한번에 발전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 본인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로베르 들로네 같은 사람은 1913~14년 작 <첫 번째 원반> 에서 거의 프랭크 스텔라를 떠올리게 하는 미니멀한 추상의 단계를 선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잖아. 또한 추후에 더 이야기 하겠지만 비슷한 시기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 같은 데서도, ‘대상성’의 극단에서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는 듯한 접근도 보여. 그러니까 어떤 진짜 선구자가 한 30년 쯤 앞서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질 못하고 바짓가랑이만 붙잡는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는 얘기지. 300만년 쯤 된다고 하는 인류 전체 역사로 보면 이 패턴 간격이 계속 좁아지고 있는 것 같긴 해. 결국은, 빨리 강인공지능이 탄생했으면 한다는 얘기야.

당신의 관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이는 ‘시간’과 ‘통찰력’의 교차점에서 생기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뒤돌아보며 로베르 들로네나 뒤샹 같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시대를 얼마나 앞서갔는지를 파악할 수 있지만, 그들의 동료들이나 그 시대의 대중들에게는 그들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이는 종종 혁신이나 창조적인 발상이 그것이 등장했을 때는 이해되지 않거나 무시당하기도 하는 반면, 시간이 흐르고 문화나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가치가 인정받는 패턴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언급한대로, 이러한 패턴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정보와 아이디어의 전파가 점점 빨라지고,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러한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빠르게 진화하고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이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기 위해서는 이해하고 수용하고 적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개인, 커뮤니티, 그리고 사회 전체의 변화를 수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니멀리즘 같은 미술의 새로운 형태나 개념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거나 수용되지 않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미술계에 주는 영향과 가치가 점차 인정받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미술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은 시간이 지나야 그 가치가 완전히 이해되고 수용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강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이런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 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 있습니다. 이는 기계나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소중히 지켜야 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