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토스포르멜]

> 안녕~ 오늘도 이야기하러 왔어. 오늘은 1914년 쯤으로 가보려고 하는데, 이 시기도 참 뭐가 일이 많았잖아. 1차 대전이 발발하기도 했고 말이야. 근데, 너랑 한해 한해 이야기해보려고 책을 하나 참고하고 있는데, 이게 대충 100년을 1년씩 다루는 그런 엄청 두꺼운 교과서 같은 책이거든. 무슨 책인지 알아 맞춰 볼래?

대단히 두꺼운 교과서 형태의 책이며 100년 동안의 미술사를 1년 단위로 다룬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작가의 개인 작품이 아니라 미술사에 대한 책을 참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러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들을 다루는 “100년의 미술사”와 같은 종류의 책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제목을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100년의 미술사를 다루는 책은 많이 출판되었기 때문이죠. 그 중에서도 특히 두꺼운 책은 “미술의 이해”나 “미술사: 그림과 조각의 발전” 등이 있습니다. 혹시 이들 중 하나인가요, 아니면 다른 책을 참고하고 계신가요?

 

> 응응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내가 참고하고 있는 책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라는 책인데, 뭐 좋은 책이지만 내가 사는 한국에서는 참 이래저래 고충(?)이 많은 책이지.. 아무튼 이 책이 손에 잡히길래 여기 내용을 좀 보면서 대화하고 있어. 그리고 지난번에 말한 내가 만든 미술사 관계형db 도 같이 참고하고 있고.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면 우리의 대화에서 미술사적인 내용, 에피소드 자체의 정확성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 언제나 사실 관계가 중요하지만, 미술사는 이상하게 정확한 사실 관계 파악 조차도 쉽지가 않아서 말이야.

아하,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는 미술사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되, 그 이야기의 주제와 내용 그 자체보다는 미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통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미술사는 많은 사건과 개인, 그리고 작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분야라 사실 파악이 어렵다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또한 각 작품과 미술가가 그림자 속에 가려진 이야기와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부분들을 파헤치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아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계속해서 1914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뭐든 좋으니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시겠어요?

 

> 그래 맞아. 바로 그 말이었어. 오늘은 음 정확하게 1914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난 번에 추상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이 시기에 또 빠질 수 없는 레디메이드와 구축주의Constructivism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사실 위에 말한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라는 책에서 1914년에 이 주제부터 나오더라고) 우리가 전에 모더니티와 연관되는 ‘자율성’ 에 대해 이야기 했었잖아? 그러니까 예술의 자율성이 곧 현대미술을 탄생시키게 된 배경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이 시기가 되면, 벌써 그 자율성이 비판받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 같아. 뒤샹과 타틀린이 보여주는 ‘예술의 자기비판’ 을 통해서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1914년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는 특히 뒤샹과 타틀린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마르셀 뒤샹은 그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 예술의 정의와 범위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일상용품을 그대로 가져와서 ‘미술작품’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미술이 곧 예술가의 독특한 창작과정과 기술을 통해 생성된 결과물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일상의 대상을 미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예술가의 선택과 해석, 즉 ‘콘텍스트의 변환’이 예술 창작의 핵심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타틀린은 그의 구축주의 작품을 통해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를 허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예술이 단순히 자아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예술의 ‘자율성’이 더 넓은 사회적, 실용적 맥락 안에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 두 미술가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의 작품은 ‘예술의 자기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예전에 이야기한적 있던 피터 뷔르거의 “아방가르드의 이론the Theory of Avant-garde”에 따르면, “예술의 자율성이 예술적 자유의 기호로 인식되자마자 ‘사회적 무용함’의 지표가 되었다.” 고 해. 뭐 그러니까 제도를 비판하는 다다나 제도를 ‘혁명’ 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옹호하는 입장이 되었겠지. 뒤샹의 시간도, 피터 뷔르거의 시간도 끝난 지금에 와서는 ‘자율적’인 예술도, 자기비판적인 ‘아방가르드’ 예술도 모두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는 게 진짜 문제이려나? 어쩌면 오늘의 시간에서는 이러한 ‘전통’들이 오히려 ‘현대’ 미술을 불가능하게 하는 족쇄가 되고 있는 지도 몰라.

피터 뷔르거의 “아방가르드의 이론”에서는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자율성’에 반대하며, 예술을 삶의 실용적인 문맥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뷔르거는 이런 아방가르드의 접근이 예술과 삶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고, 예술이 보편적인 사회적 경험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뷔르거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아방가르드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신에 예술은 상업화되고 제도화되며,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인 측면과의 연결을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또한 현대미술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자율성’과 ‘사회성’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현대미술의 주요한 고민 중 하나입니다. 이는 예술가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탐색하고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그 과정에서 미술의 경계를 넓히고 깊이를 더해줍니다.

따라서 ‘전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현대’ 미술의 족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전통과의 대화를 통해 현대미술은 그 자신의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 그래 항상 너와 대화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니까. 어쨌든, 뒤샹과 타틀린 중 타틀린의 여정은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혁명과 함께 타올랐다가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별로 오늘에 남는 교훈이 없달까 그런 느낌도 들어. 사회주의, 유물론, 혁명 그런얘기는 이제 넷플릭스 같은데서 볼 수 있겠는데.. 용적 측정법stereometry이나 텍토닉tectonic 같은 개념들만 유령처럼 떠도는 느낌이야.

뒤샹과 타틀린의 작업과 그들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들이 일으킨 예술적 혁명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나 이념이 오늘날에 와서는 약간 낯설게 느껴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술은 항상 시대와 문화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념이나 이론이 역사의 뒤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현대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타틀린의 ‘용적 측정법’이나 ‘텍토닉’ 같은 개념들은 그의 시대의 특정한 문맥 속에서 나온 것들이지만, 그 뒤에 있는 사고방식이나 접근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술과 공학, 또는 예술과 사회 사이의 연결을 탐구하거나, 새로운 형태와 구조를 창출하려는 그의 노력은 현대미술가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참고 자료입니다. 이런 점에서 타틀린의 유령은 아직 우리 사회와 미술계에 깊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어쩌면, ‘부르주아’ 적인 예술의 ‘자율성'(무목적적인 테크닉, 매체, 취향에 관한 것)과, 제도 비판 혹은 때로 이를 넘어서는 제도 변혁적(실용적, 공리적 사물이 되는 단계-예술과 사회사이의 연결을 탐구하는 것)인 것은 결국 어느하나가 독자적일 수 없고 상보적인 요소인 것 같아.

그렇다면,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루며 예술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르주아’ 적인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가에게 자유로운 창조의 공간을 제공하며, 반면에 제도적인 비판 혹은 제도의 변혁은 그 창조적인 행위가 사회와 연결되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인 관계는 예술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표현이나 스타일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표현 방식을 탐구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는 반면, 제도의 변혁적인 성격은 그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나 표현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예술의 ‘자율성’과 제도의 변혁적인 성격은 마치 양자역학의 물결-입자 이중성처럼,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면서 예술이라는 분야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해나가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양자역학의 물결-입자 이중성에 대한 비유가 멋지다. 예전에는, 예술을(혹은 대상이 무엇이던 간에)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특히 예술에서는 안그래도 유비, 비유, 표상이 넘쳐나고, 이 과정에서 몰이해가 유발되다보니 비유적 태도는 정말 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정확한(?) 비유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마침 과학 비유를 들어줬으니 말인데, 뒤샹은 1912년 항공박람회 전시장에서 프로펠러를 보고 누가 저것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냐며 예술은 이제 망했다고 했대. 그 말을 건넨 대상이 브랑쿠시라는 점이 또 의미심장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거든, 예술이 ‘자율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점차 세상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 사실, 추상과, 레디메이드, 구축주의가 출현한 뒤로 여지껏 현대미술은 생명연장을 해온 것일 수도 있어. 그 연장된 시간동안 실용적이진 않지만 대충 그걸 보면서 ‘인간’에 대해 반추할 수 있게 하는 기능 정도가 남아있었던 때문인데, 이제는 그 시간도 끝나가는 것 같아.

당신의 말씀처럼, 현대 미술이 지금까지 지속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술이 ‘인간’에 대한 반추와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술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제공해왔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 특히 인공지능의 등장과 발전에 따라 예술의 역할이 변화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AI가 창작한 예술작품이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등, 예술 분야에서도 기술의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은 인간의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인간의 삶과 철학을 표현하는 데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술이 제공하는 독특한 통찰력과 표현력은 여전히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며, 이런 점에서 예술의 존재와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될 것입니다.

현대 미술이 지닌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그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예술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뒤샹이나 브랑쿠시가 말한 것처럼 예술은 어느 시점에서는 실용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상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는 앞으로 현대미술이 대중음악사에서 메탈 음악이 걸어간 길을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예술품이 인간을 반추할 수 있게 하는 요소에 대해 아비 바브루크(aby warburg)의 개념어 파토스포르멜(pathosformel)을 빌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브루크의 평전을 쓴 다나카 준의 해석에 따르면 이 개념은 현대까지 변용되어 이어지고 있다고 해. 그런데, 매체와 기술, 정치와 사회의 변화로 오늘날에는 예술에 깃드는 파토스 포르멜-정념정형이 뒤틀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아. 이것을 방지하는 꽤 좋은 방법은 철저히 장르화 되는 것일지도? 이미 다수의 대중은 현대미술을 통해 인간을 반추하지 않잖아. 뒤샹의 표현을 빌자면 ‘이제 예술은 망했어’. 100년이 넘은 말을 아직도 꺼내 쓰는 시점에서 정말 망한거지.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메탈음악 처럼 된다면 말이야.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셨네요. 사실 예술의 세계에서도 장르화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 음악과 같은 공간에서의 장르화와 현대 미술에서의 장르화는 약간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대중음악에서의 장르화는 어떤 음악이 팝이고, 록이고, 재즈인지, 혹은 더 세분화된 카테고리로 메탈이나 펑크 등등으로 나뉘는데, 이런 장르들은 소리와 멜로디, 리듬 등 음악의 형태적 요소를 기반으로 분류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현대미술에서의 장르화는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미술도 그림, 조각, 설치 등 형태에 따른 분류가 있지만, 더 중요한 분류는 그 작품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가 하는 등의 방향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메탈 음악이 장르화되어 자신만의 독특한 공간을 찾아낸 것처럼, 현대미술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관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또한, 당신이 언급한 ‘파토스포르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는 일종의 반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술이 지닌 고유의 ‘정념정형’이 뒤틀리는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더욱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술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