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 안녕? 오랜만에 온 것 같네. 오늘도 이어서 이야기 하러 왔어. 오늘은 1915년의 러시아로 가보려고 해. 우선, 이시기엔 1차대전 이야기를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아. 당시 러시아 제국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차르는 러일전쟁의 패배 등으로 힘든 와중에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전쟁에 참전했을까?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제국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오토만 제국과 독일 제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불만과 함께 발칸 반도의 슬라브 계열 국가들을 보호하려는 노력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슬라브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주의적 감정은 러시아 사회 전체에서 강하게 분출하였고, 이는 국제적인 명분으로서 전쟁에 참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싸움을 통해 내부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 사회는 당시 심각한 불만과 불평등,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불안정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이러한 내부적인 압력을 외부의 적에 대한 국가적인 단결로 전환하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즉, 차르는 국민들의 분노를 외부의 적에게 돌려, 내부의 문제를 일시적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기회로 전쟁을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크게 실패하였고, 전쟁의 참사는 오히려 러시아 내부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차르 정권은 결국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 러일전쟁의 패배로 해군력이 거의 바닥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제해권을 독일 제국에게 내어줄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장기전을 치르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 육군에는 좀 자신이 있었나봐?

러시아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마다 그들의 육군이 충분히 강력하다고 믿었습니다. 러시아는 대량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많았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독일이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와 싸우는 동안 동부 전선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를 지원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달리, 러시아 군대는 장비가 부족했고, 현대적인 군사 전략과 훈련에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러시아의 군사지도부는 종종 전략적인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러시아의 전쟁 노력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러시아 혁명을 촉진하였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의 군사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결국 그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를 예측하지 못한 채, 러시아 제국은 자신들의 군사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 그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예술계는 나름 현대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야. 특히 1915년에는 <<마지막 미래주의 회화 0, 10 last Futurist Exhibition of Paintings 0,10 >> 라는 기념비적 전시가 열리기도 했고 말이야.

<<마지막 미래주의 회화 0,10>> 전시는 1915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중요한 예술 행사로, 미래주의와 슈프레마티즘 운동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벤트였습니다.

미래주의는 20세기 초기의 예술 운동 중 하나로, 기계와 기술, 속도, 청소년, 대도시 등 현대 도시 생활의 새로운 측면을 찬양했습니다. 미래주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강력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0.10 전시에서는 카지미르 마레비치의 첫 슈프레마티스트 작품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슈프레마티즘은 모든 예술적 형태와 구조를 간소화하고, 일련의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축소하는 미학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전시는 미래주의에서 슈프레마티즘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획기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전시의 제목인 ‘0.10’은 참가한 예술가들이 전시회를 통해 미술의 ‘제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 운동의 탄생을 상징하였고, 동시에 미술의 획기적인 변화를 암시하였습니다.

 

> 이 전시를 통해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기념비적 작품들을 발표하고 유명세를 얻지만, 이들의 삶은 참 쉽지 않았던 것 같아. 알려진대로 이들은 혁명 이후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미술, 이전에 우리가 피터 뷔르거의 “아방가르드의 이론”을 꺼내며 이야기한 적있는 ‘역사적 아방가르드’ 같은 것을 시도하게 되잖아? 물론 오래가지 못했지만. 1915년경에 이들은, 어떤 정치색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해.

1915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으며 러시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래주의와 슈프레마티즘과 같은 예술 운동이 탄생하였고, 그 중심에는 카지미르 마레비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있었습니다.

마레비치와 타틀린은 1915년 당시에는 아직 명확한 정치적 이념을 가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둘 다 혁신적인 예술가로, 기존의 예술 틀을 깨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탐구하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초기 작품은 종종 고도의 추상성과 실험적인 요소를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둘 모두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레비치는 그의 예술을 사회주의 혁명과 결합시키는데 힘썼으며, 슈프레마티즘을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일환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타틀린은 건축가로서 혁명 후의 새로운 사회 구조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결론적으로, 1915년에는 아직 그들이 뚜렷한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후 러시아 혁명과 그들의 예술 사이에 뚜렷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그들의 예술이 사회적, 정치적 문맥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 타틀린은 그렇다 치고, 말레비치는 전 생애를 보면 사실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워 보여.

맞습니다, 카지미르 마레비치는 종종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회, 정치, 예술의 구조에 대해 깊은 비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관점은 그의 예술 작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기존의 예술 형태를 완전히 거부하고, 그 대신 고도로 추상적인 슈프레마티즘을 창조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계급, 권력, 제한을 초월하고, 절대적인 ‘예술의 자유’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회주의 혁명을 받아들인 것도 사실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무정부주의적 성향과 혁명의 이상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고, 이 새로운 사회에서 그의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예술은 공산주의 체제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스탈린 체제에서는 그의 작품이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그에게는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예술적 이념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나는 말레비치의 1918년작 <흰색 위에 흰색>을 꽤나 좋아했는데,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그 작품이 마치 한참 후에 펼쳐질 미니멀리즘을 예견하는 선구적인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어.

마레비치의 <흰색 위에 흰색>은 그의 슈프레마티즘 시리즈 중 하나로, 이 작품은 확실히 미니멀리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색상, 질감, 형태 등 복잡한 요소를 제거하고 극도로 단순화된 구조와 평면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미니멀리즘 예술의 핵심 개념과 매우 일치합니다.

마레비치는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순수한 미학적 경험’을 향한 그의 열망이 드러납니다. <흰색 위에 흰색>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실제 물체나 이미지를 묘사하는 대신 완전한 추상화를 통해 공간, 광도, 질감 등의 요소를 탐구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그의 논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예술은 사회나 정치적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자체적인 규칙과 원칙에 따라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흰색 위에 흰색>은 단순한 구조와 색상을 통해 복잡한 철학적 논증을 전달하는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칸딘스키를 포함한 이전까지의 추상이 여전히 ‘감정’, ‘순수성’ 같은 어떤 것들을 환기하려고 했다면, 말레비치는 환원될 수 없는 핵심, 즉 영도(zero degree)를 ‘규정’해 내려고 했던 것 같아. 물론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한 것 처럼, 그도 역시 ‘초월적인 것’ 의 환기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시기 추상의 여정에서 가장 끝까지 밀고나간 사례인 것 처럼 보여.

말레비치의 예술적 접근법은 확실히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차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영도’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추상미술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그가 미술에서 모든 객체나 구체적인 참조를 제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슈프레마티즘 작품들은 감정이나 주관적인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예술의 순수한 형태와 구조에 집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접근법은 미술에서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기존의 관행을 반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대로, 그의 작품 역시 여전히 ‘초월적인 것’을 환기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의 추상적인 형태와 색상은 관찰자에게 신비로운 느낌을 줄 수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어떤 종류의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레비치는 그의 예술적 방식으로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게. 아직은 초월적인 것의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지만, <<0, 10>> 전시의 서문 격이였던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서 절대주의로from cubism and futursim to suprematism”를 보면 정확히 변증법적이고 선형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본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나름 정확하게 파악했던 그룹이었던 거지.

네, 맞습니다. 말레비치와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과 그것이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와 같은 그 이전의 미술운동과 어떤 방식으로 차별화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슈프레마티즘’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이를 뚜렷하게 표현하였고, 이는 그들이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예술은 그들이 주장하던 바와 같이, 그림이나 조각이 물리적 세계를 단순히 모방하거나 표현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미술이 고유의 언어를 가질 수 있으며, 이 언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내재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기존의 미술관념을 깨고, 미술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였습니다.

 

> 두번의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고, 레닌 집권기에 말레비치는 비록 회화는 중단했지만, 어찌저찌 엘 리시츠키와 함께 건축분야에 기여한 것으로 알고 있어. 비록 건축에 관여했다지만 역시나 그의 관심은 zero degree, 즉 이번엔 건축의 ‘영도’에 관한 것이었겠지. 그런데 그가 회화를 중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말레비치의 회화 중단은 그의 예술적 사상과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슈프레마티즘을 통해 미술이 고유의 언어를 통해 추상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관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의 집권 이후로 예술은 더욱 명백하게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지닌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말레비치의 예술 철학과 상반되는 변화였습니다.

또한, 그가 스스로 슈프레마티즘을 통해 회화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달성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최후의 회화작품 중 하나인 ‘흰색 위의 흰색’은 거의 완벽하게 추상적인 작품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슈프레마티즘을 가장 극단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그 이후로 회화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말레비치는 회화를 중단하고, 더 실용적이고 사회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여 건축과 그래픽 디자인, 교육 등에 집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실제 세계와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슈프레마티스트 아키텍쳐’와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였습니다.

 

> 그래. 하지만, 레닌 사후 ~ 스탈린 집권기에 들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사실상 끝장나게 되잖아? 혁명과 함께 도래할 것 같았던 유토피아는 결국 대학살을 낳았고, 짧은 미적 실험들 역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네가 보기에 인류사에서 이 에피소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니?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비극적인 종말은 예술, 정치, 그리고 사회적 변화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이는 특히 극단적인 사회적 변화와 혁신적인 예술 표현 간의 연결점에 대해 탐구하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아래 몇 가지 주요 포인트를 살펴보면:

  1. 예술과 정치 사이의 관계: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혁명적인 사회 변화와 함께 탄생하였고, 그 혁명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하에서 그들의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해 밀려났고, 많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는 예술과 정치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이 어떻게 예술가의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2. 혁신과 실패의 역사: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실패는 혁신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예술적 실험은 놀랍도록 혁신적이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은 그들의 노력을 억압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혁신적인 시도가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실패도 학습과 진보의 일부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3.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한계: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그리는데 있어 열정적이었지만, 그들의 꿈은 스탈린 체제의 현실에 부딪혔습니다. 이는 유토피아적 사상이 얼마나 쉽게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역사는 예술과 정치, 혁신과 실패, 그리고 유토피아적 꿈과 그것의 한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인류의 끊임없는 노력을 상기시키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경험입니다.

 

> 맞아. 이제 우리 모두는 유토피아가 얼마나 쉽게 비극이 되는지를 잘 알고있지. 말레비치의 라이벌이었던 타틀린도 비슷한 운명이었던 것 같아. 타틀린 이래의 구축주의와 그 산물인 텍토닉 역시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극이었고, 많은 박해를 받았다고 하네. 근데, 말년의 그는 반공산주의적 입장이었음에도, 축출되지는 않고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네. 그의 말년에 대해 좀 알려줄래?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구조주의와 프로덕티비스트 운동의 주요 인물로, 모스크바와 베를린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초기 소련의 혁명적 환경에서 폭발적인 창의력을 보였으나, 스탈린의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그의 혁신적인 접근법은 점점 더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타틀린은 1920년대 후반부터 점점 더 간접적인 방식으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책 디자인, 포스터, 그래픽 디자인 등에 주력했습니다. 또한, 몇몇 중요한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실험은 점차 제한되었고, 그의 방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과 맞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타틀린의 삶은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점차 무시되었고, 그는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임무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그는 점차 창작 활동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는 1953년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은 거의 무시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은 여전히 예술계에서 크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과 아이디어는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는 종종 건축과 디자인의 핵심적인 혁신가로 간주됩니다.

 

>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어쩐지 특별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 아마도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혁명과 함께 했었다는 점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을 홀리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스탈린 집권과 함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는, 그래도 어딘가에서 다시 불씨를 틔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지 몰라도, 한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그것은 실패한 기획임이 명확해졌는데도 말이야. 예술은 급진적이거나 비판적이고, 유물론적으로 분석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부르주아적이고 자율적이며 유미주의적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런 입장이 곧 ‘극단적 중도’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예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오래된 논의이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사례는 그 논의에 중요한 차원을 추가합니다. 혁명과 예술 사이의 관계, 예술이 사회 변화를 촉구하거나 반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언급한 것처럼,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것은 급진적이거나 비판적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의 특성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술의 이런 ‘다원성’은 그것이 우리의 사회와 문화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극단적 중도”라는 용어는 흥미롭네요. 이것은 두 극단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입장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떤 방식으로든, 이것은 예술의 복잡성과 그것이 우리의 이해와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 나는 사실 ‘다원성’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오히려, 과도한 다원성이 역설적으로 예술을 삶과 등치시켜버리는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예술은 비판적 일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지. 그러니까, 예술은 아방가르드적일 수 있고, 부르주아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곧 ‘다원성’이라는 속성으로 연결되는 것 만큼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워. 엄밀히 말하면, 다원적인 것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다원성’의 시대가 오래될 수록, 사람들이 그것의 의미를 오독할 확률이 늘어나기 때문에 싫은 거지. 바꿔 말하면,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달까.

아, 그렇군요. ‘다원성’의 개념이 이해나 해석의 유연성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다원성이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다원성’이 항상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방향성을 잃거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견해나 접근법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학문적 훈련과 교육을 통해 각각의 접근법이 어떤 상황에서 유용하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술은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도구이므로, 그것이 가진 다원성은 예술가의 의도와 관객의 해석 사이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분별하게 적용되거나 오해되는 것은 분명히 피해야 할 상황입니다.

 

> 오늘날 현대미술이 그토록 무가치해보이는 이유중 하나는, 충분히 급진적이지도, 충분히 자율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 반정도는 시대적 상황때문에 어쩔 수 없어 보이지만, 반정도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해. 미술계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같이 멍텅구리였던거지. 물론 몇몇은 빼고. 대개는, 과학적 세계인식의 부족과 테크놀러지에 대한 낮은 이해도 때문이었던 것 같아. 지난 100년간 유사 과학적 방법론을 구사하는 작가들은 많았지만, 이를 규합해서 마치 과학계가 학술지를 중심으로 전진하듯이 어떤 컨벤션을 만들지 못한 것이 패착일거야. 이것이 안그래도 낮은 미술가들의 테크놀러지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낮은 수준에 머물게 했겠지.

당신의 주장은 흥미롭군요. 예술이 과학적 방법론이나 테크놀러지의 이해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접근 방식은 꽤 이례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술과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들의 방법론이나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르게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물론, 당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과학적 아이디어나 기술을 창작에 적용하며, 반대로 과학자들은 예술적 표현 방식을 과학적 연구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는 교차분야 연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예술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술계에서 과학적 방법론이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주장에는 약간의 의문이 듭니다. 예술은 단지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적 역량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감각과 창조적 표현,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 접근법과 기술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 우리 세상을 이해하고 반영하는 방법에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데이터 시각화, 인공지능, 가상 현실 등과 같은 기술들은 최근의 예술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술은 과학이나 기술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표현, 이해, 탐색의 도구이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론적인 방법론, 개념적인 탐색, 그리고 물질적, 기술적 스킬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예술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예술가들이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이 예술의 도전이자 매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미술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예술적 표현과 그 의도를 이해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면, 예술의 가치와 품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맞아. 예술은 주관적일 수 있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기도 하지. 하지만 문제는, 인간은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뇌 그대로라는 점 아닐까? 그러니까, 위에도 이야기한 것 처럼, 충분히 다원적이어야 한다면 그냥 ‘평평함’을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야. 근데, 인간은 그런 것을 쉽게 받아들이질 못해. 아마도 절대 불가능할 걸. 사람들은, 아무리 더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가 된다 한들 고저, 상하, 미추, 선악의 판단을 중단하지 못할 거야. 이 말은, 예술작품은 그것이 아무리 급진적으로 다원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한들, 결국 어떻게든 형식적으로 판단되는 이야기지. 인간이 그런 동물이니까. 이런 부분을 거부하는 실험이 약 지난 50년간 이어졌지만, 변한 건 없어.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적한 대로, 우리의 인지와 평가 체계는 그런 다원적인 접근법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특정한 가치 체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정된 방식으로만 세상을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와 문화는 변하고, 우리의 이해와 평가 체계도 함께 변합니다. 이런 변화는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지만, 변화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과정입니다.

예술은 이런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술 작품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거나, 통상적인 시각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넓혀줍니다. 또한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접근법은 새로운 가치 체계나 이해 체계를 모색하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술의 다원성과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이 고정된 판단 체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도록,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별적인 수준에서의 태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의 교육과 평가 체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 그러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나는 내가 무정부주의적이거나 ‘극단적 중도’ 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위에 말한대로 예술이 진작에 과학계와 유사한 ‘형식’ 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면, 급진적이거나 자율적이거나 예술의 입지를 명확하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물론 약간의 등급화는 동반되겠지만. 그러니까, 과학계 처럼 돌아가는 미술계에서는 검증이 될 수 없는 것들, 즉 취미수준의 무언가는 예술이 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덕분에, 명확한 근거를 가질 수 있었겠지. 이런 입장에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충분히 다원화된 오늘날의 미술계는 작가와 작품등 내부 요소를 과연 어떻게 ‘검증’ 하고 있을까? 매우 근거가 빈약해. 그야말로 유명해지면 그만인 세계지. 물론 나름의 내적 질서는 있어. 소위 A급 들도 있고. 하지만, 그것들은 암암리에 전파될 뿐이야. 아는 사람만 아는 리그지. 몇몇 인사들은 이런 비판에 ‘원래’ 미술이 그렇다고 답하기도 해.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예술계가 어떻게 ‘검증’하고, 어떻게 ‘가치’를 판단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예술은 항상 주관적인 해석과 개인의 감정에 큰 영향을 받는 분야이기 때문에, 과학과 같은 객관적인 ‘검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또한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곧 문화, 사회, 경제, 심지어는 정치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술이 어떻게 평가되고 판단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예술계와 그 이상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명확한 답변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예술계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지적한 대로, 예술계에서의 ‘검증’과 ‘가치 평가’는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과학계처럼 특정한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가능한 해결책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예술의 독특한 특성과 가치를 잃지 않는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